[영남지리답사] 남평문씨세거지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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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6-03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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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리답사 課題도 하고 평소 이 곳을 한 번 가보고 싶었기에 일석이조란 마음으로 이 곳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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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남평문씨본리세거지와 인흥서원에 대하여...
내용요약 Ⅰ.답사를 떠나며...
다.
설명
남평문씨, 남평문씨세거지, 인흥서원, 인흥마을, 수봉정사, 광거당, 인수문고
(文永樸)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경호의 손자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과 그의 아들 수봉(壽峯) 문영박 문영박(文永樸, 1880~1930). 인흥에 터를 잡아 마을을 세운 경호공의 증손으로, 학자이며 경륜가로 명망이 높다.
세거지에 최초로 건립한 건물은 재실 용호재(龍湖齎)로 현재 광거당이 있는 곳이다. 생각보다 답사장소를 쉽게 택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고택들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올 때 붓대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와, 이를 전국에 전파해 유명하다. 입구에 들어서자 대구광역시 소속의 가이드 한분이 반갑게 맞아주셨고, 이 곳을 라운딩하며 설명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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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리답사] 남평문씨세거지를 다녀와서...
남평문씨의 중시조로 알려진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문익점(文益漸, 1331~1400). 본관은 남평(南平).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1363년 좌정언(左正言)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에도 갔었다.
의 후손이 대구에 입향한 것은 대체로 500년 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 곳 인흥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의 18세손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儆鎬, 1812~1874)때이다. 저택이 들어선 것은 1800년대 후반으로 처음에는 초가로 처음 했으나 그 후 100년에 걸쳐 지금의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그는 문씨만의 마을을 만들 것을 계획하고 원래 고려의 대찰(大刹)인 인흥사가 있었던 자리에 터를 잡아 오늘의 인흥마을을 새로 열었다고 한다. 그 곳이 바로 「남평문씨본리세거지」즉, 인흥마을이다. 화원에 10년을 넘게 살면서도 한 번도 안 가봤기에 이 곳을 답사장소로 정했다.
지난 2005년 6월 5일에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위치한 「남평문씨본리세거지」에 다녀왔다. 수만의 전적(典籍)을 모아 학문 진흥에 이바지하였으며, 조국의 광복운동에도 크게 기여해 오늘의 세거지를 있게 한 중추적 인물이다. 돌아가시 후에는 상해 임시government 로부터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으로서의 조문(弔文)도 있었다.
현재 70여채의 기와집이 한울 안에 정연히 들어서 있는 이 마을은 건축 연대가 200년 미만이지만 전통적인 영남지방 양반 가옥의 틀을 지키고 있으며, 세거지 구성과 주위 경관의 조화는 어느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마을이라 하겠다. 길은 아스팔트길이었지만 차창 밖으로 펼쳐진 논밭들, 그리고 산... 모내기 하시는 어르신들... 시골의 정취가 느껴졌다.
이 날 비록 더운 날씨였지만 햇살 좋은 날에, 특히 여자친구와 함께 해서 더 좋은 기분으로 다녀올 수 있었다.
순서
직접 발로 뛰며 답사한 내용을 토대로 만든 입니다^^
직접 발로 뛰며 답사한 내용을 토대로 만든 자료입니다^^
그리고 남평 문씨 집안은 탁월한 경제 능력과 학문을 함께 갖춘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내가 사는 곳이 화原因지라 이 곳을 몇 번 스쳐 지나갈 기회가 있었고, 요즘 산책로로 유명한 수목원에 드나들면서 「남평문씨본리세거지」라고 쓰인 팻말을 본 적이 있었다. 1440년 세종이 영의정을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추봉했다.
1. 인흥마을과 남평문씨의 유래(由來)
이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타고 아스팔트길을 10분 정도 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