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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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7-12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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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점에서 세습신분이며 비자유민인 천인과 엄격히 구별된다고 한다. 조선초기는 양반이 지배계층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인계층이 다 같이 참여하는 개방된 사회라는 것이다.
우창비왕설‘을 내세워 공양왕 옹립 → 정몽주 살해 → 1392 공양왕폐위, 조선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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⑷왕조교체와 정치적 재편성 : 위화도 회군 직후 결성된 이성계 일파가 새왕조에서 권력구조의 중심부를 이루고 개국공신의 주인공이 됨. 정도전이 『조선경국전』을 통해 새 왕조의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였고, 태조대에는 조선왕조의 모습이 어느정도 갖춰짐. 그러나 조선이 고려에서 벗어나 온전한 새왕조 체제를 구축한 것은 태종대에 들어선 다음 대명관계 문제 해결, 노비변정사업, 사찰혁거와 정비를 통해서 왕조교체가 비로소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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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 ⇒한영우: 민본국가, 신분적개방성을 강조하면서 조선의 건국을 중세에서 근세로 진입하는 분기점으로 봄
ⅲ지배이념 :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지향하여 탄생한 봉건국가 (성리학: 신분제와 지주제를 옹호하는 사상체계),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농민의 요구를 수렴한 것은 어디까지나 중소지주의 입장에서 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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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선왕조 성립에 대한 평가 -정체에서 발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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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조선과 고려를 같은 동질의 사회로 파악
- 토지소유관계:토지국유의 원칙을 표방하면서 사적 소유권이라는 현실 반영
피지배신분-양인,노비로 나누어 각 신분의 세습성이 강하다고 봄
․ 신흥사족과 사림파 같은 계통으로 파악
건국의 point 理論(이론)가인 정도전 사상의 analysis을 통해 왕조의 통치이념을 명확히 하고, 농민의 처지와 밀접한 신분과 토지문제를 궁구. 특히 신분제 變化에 주목하여 양천제설 조선초기 신분구성은 양(良)신분과 천(賤)신분으로 이루어졌고, 천인을 제외한 양인들은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관리가 될수 있었다.
․ 농업생산력의 발달: 시비법,수차(水車),천방(川防)의 수리시설 발달 → 휴한법 극복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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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정체(식민지시대) ; ①조선건국은 원․명이 교체되는 동양의 정세變化에 힘입은 것으로서 친명사대파가 친원사대파를 대신하여 정권을 탈취한 사건에 불과 ⇒ 일본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 하는 이데올로기 작용 ②이상백『진단학보』-고려․조선의 교체는 무슨 전체적인 사회혁명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고, 단지 왕실왕조의 역성적혁명, 즉 일종의 왕권교체에 불과하였던 것
⑵신흥사대부론(1960년대): 신흥 사대부 무인집권기 이래 신분적으로는 향리에 기반을 두고,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과거나 군공(軍功)등 주로 후천적 능력을 통해 성장한 신흥 정치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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⑸역성혁명의 특이성 : ①고려의 쇠망사가 조선의 건국사와 겹침 ② 군사력을 직접동원한 무력충돌대신 대간의 언론을 통한 정쟁이 치열하게 전개됨 이성계의 군사력 장악은 세력을 강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정쟁에 군대는 거의 동원되지 않았고, 대간의 언론이 결정적 역할을 함
조선의 건국은 봉건적 지배질서의 재조정, 혹은 중세사회 내부의 발전과정으로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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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정치주도세력의 확인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성립에 관한 발전적 인식 토대 마련. 이우성『고려조의 리(吏)에 대하여』, 이기백『한국사신론』,한영우『한국사』「조선왕조의 정치․경제기반」, 민현구 『한국사』「고려후기의 권문세족,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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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조선초기 신분․계층 구조: 지배신분 -양반(상급 지배신분),중인(하급지배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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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14.15세기 연속성을 전제로 사회 제관계의 변동파악


향도(香徒)중심의 지역촌 → 리(里)단위의 자연촌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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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위화도 회군 이후의 개혁과 정쟁: 정권을 잡고 불법과 부정을 자행해온 시중 임견미 일파를 병권을 장악한 최영이 숙청, 명의 철령위 설치로 촉발된 요동정벌을 강행하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1388) → 이후 신․구 세력의 대립구조 짜이게 됨. 특히 조준의 전제개혁 상소로 인해 고려사회의 變化와 개혁을 주장하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일파와 그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보수적 세력이 양분됨으로써 그후 신․구 세력이 정치적 투쟁을 벌이는 대립구도 출현 → 과전법의 성립으로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 승리 → ‘ 이성계 등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 하여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양인에는 백성이나 공상인(工商人)․간척지도(干尺之徒)와 같은 신양역천(身良役賤) 그리고 향리가 포함되는데, 이들은 법제적으로 권리와 의무에 차등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유민이며, 세습신분이 아닌 성취신분이다.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이성계 등의 공양왕 옹립이나 조선건국을 합리화시키려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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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⑶연구
⑵ 우왕대 대외관계의 시련과 왕권의 추락: 고려에 대한 명의 압박, 왜구의 피해(대외관계의 시련), 합좌기구로서 도평의사사가 政府(정부)의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유력한 무장들을 중심으로 재상들이 정방제조로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과두정치 행해지고 왕의 방탕하고 일탈된 행태보임.
⑴ 공민왕대 개혁정치의 양면성: 공민왕대는 반원개혁을 통해 고려가 원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서 새 출발을 하는 시기. 그러나 원과 무력으로 대결하고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무장세력 강하게 대두. 성균관을 다시세우고 신흥 사대부 계열의 신진문신세력이 등장하여 새로 도입된 성리학을 익힘 ⇒ 고려를 원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립된 왕국으로 거듭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왕조 교체의 단서를 마련하는 양면성을 지님
①조선의 건국은 고려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회의 성립의미
-전주전객제와 지주전호제라는 중세경제체제 두가지 틀 가운데 수조권이 강화․팽창하는것을 저지함으로써 소유권이 안정․성장할수 있도록 보장, 국왕․국가는 사대부 양반에게 과전을 분급한 대가로 충성스런 직역봉공요구
ⅱ과전법
조방농업 → 연작상경의 집약농업으로 바뀜 (신흥사대부가 주도)
③ 왕조교체가 특정 시점이 아니라 일정기간의 전환기를 거쳐 이루어졌음
다.